디자인의 역사

2020. 12. 26. 00:48무료공유파일/디자인관련정보

디자인의 역사



1. 원시공동체에서의 디자인
구석기시대의 인간은 자연을 활용하고 관찰하고 모든 가능성의 발견과 사용하기에 알맞은 것을 고르는 인간 특유의 창조성으로 자연에 새로운 모양을 주려는 행동이 곧 디자인의 근원이 되었다. 여기서 조형의 이미지를 살리는 가장 좋은 소재는 흙이었는데 흑은 물을 섞으면 반유 동적인 상태가 되고 거조 해지면 딱딱해지는 성질을 갖게 되어 조형의 재료로 삼기 매우 좋아 벽, 그릇, 토우 등으로 유용하게 쓰였다. 목재도 가공 성형이 쉬웠으므로 중요한 소재가 되었고, 돌은 신비와 저주의 대상이 되었다.
인간이 불을 쓰기까지에는 수천년이 걸렸고 신석기시대에는 금속과 유리가 발명되었다. 그 속에서 보다 투명하게 빛나고 매끄러운 아름다움을 추구하였을 것이다.
B.C4000년대 신석기시대의 크로마뇽인은 동굴 벽화를 그렸는데 이는 사회적 주술적 종교적 의미가 담긴 디자인이며. 美(미)나 쓰임새를 구별하지 않은 것이다. 그리고 사회조직이 거대화됨에 따라 상형문자가 탄생하게 되었다.


2. 노예제도에서의 디자인
메소포 타미야 문명은 상품에 메이커를 인식시키는 상호나 도장을 찍어 그것을 보증해 주었다. 이것은 오늘날 사용되고 있는 트레이드 마크와 같은 역할을 했다.
이집트에서는 색채 자체가 신을 상징하였고, 과학의 요소였으며 태양과 별을 상징하였고 병의 치료수단이었고 종교의 근본이었다. 이집트의 조각은 신과 왕의 권위와 힘을 시각화하고, 이상 속에서 개성을 발견하려 했고, 승려들의 초상화 형식이 많았다. 회화에는 주술적 기능이 강하게 표현되어 있으며, 대상의 인상적인 부분을 조합으로써 나타내고 있다.
그리스인은 기호표시나 조형 표시를 기능별로 분화시킨다든가, 형태적으로는 명료함을, 철학적으로는 합리성을 추구하였고, 우주를 하나의 질서와 조화를 가진 완전한 것으로 표상했다. 그리스의 대표적인 건축물인 파르테논 신전은 도리스식으로 간결하면서 장중함과 정온함을 나타내고 있으며, 우주를 나타낸 디자인이 돋보인다, 시간에 대한 사고도 둥근 쇠고리같이 둥글었고, 후기 헬레니즘 시대에 와서는 라오콘 군상처럼 인간의 감정이나 육체의 움직임을 나타내는 디자인이 많이 등장했다.
호마인은 곡물상가, 구두상가, 유리 상가 등이 집단으로 몰려 있었는데 이것을 소개하는 행위는 일종의 그룹 광고의 최초 형식이라 할 수 있다. B.C20년경부터는 유리를 개발해 유리그릇이 일반적인 일용품으로 쓰이게 되었고 유럽 건축의 기본이던 아치 구조의 기술 발전을 촉진시켰다. 그리고 로마인은 에트루리아나 그리스에서 완성된 알파벳을 돌에 새기며 일정한 모양을 만들었는데, 이 스타일의 문자가 오늘날 대문자 알파벳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이 당시에 책은 직접 손으로 써야 했는데 필 기자들은 가능한 쉽게 쓸 수 있는 자형인 필기체를 탄생시켰다. 로마의 조각은 그리스 후기의 디자인을 다시 살려 산 인간의 모습을 표현했고, 조각은 기록적인 성격인 강해졌으며, 자기 위엄을 전달할 목적으로 초상 조각이 유행하였다.
페르시아는 화폐경제 시스템을 도입하여 활발한 교역을 전개했는데 고대 페르시아의 금화인 다레이코스에 다리우스 왕의 초상을 디자인했다. 이것은 돈에 지배자의 초상을 새긴 시초였으며, 지배자가 자기의 이미지를 전능으로 하는 PR의 최초 예라고 할 수 있다.


3. 봉건사회에서의 디자인
중세의 유럽은 크리스트교 아래에 속박당해 있었는데, 천국이나 지옥을 본 사람이 없었으므로 교회의 이상을 어떻게 시각화하느냐가 큰 과제였다. 그리하여 신과 인간, 또 악마의 유혹에 찬 현세와 후세를 시각화하기 위해 이집트 시대의 주술적이고 섬직한 조형 양식과 같은 상징적인 표현이 다시 부활되었다. 이러한 관점에서 조각은 너무나 현실적인 느낌을 나타냈고, 회화는 풍부한 공상적 이미지를 나타냈다, 그 때문인지 점차 회화적인 표현이 애호를 받게 되었다. 조각에 있어서도 초상 조각과는 대조적으로 육체적인 아름다움을 부정하는 경향이 나타났다.
게르만 민족은 로마의 구상성보다 추상적인 것을 지향하였는데 이로써 유럽 중세의 로마네스크 예술의 디자인은 포르포션이 아니라, 추상성이나 문양 성에 있다고 해도 좋다, 크리스트교는 십자가를 심벌로 결정함으로써 현대의 모든 선전수단에 필히 사용하는 심벌마크를 인간생활에 최초로 실현하였다.
이렇듯 유럽에서는 확실한 사고에 따라 실용적인 기술의 진보도 눈부시게 발전하였고 특히 건축분야에서 돌을 곶처럼 만들던 구조에 반하여 아치나 볼트를 이용한 얇고 넓적한 돌 구조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그리고 이것은 고딕건축이 선보이면서 위로 길게 트여 채광면이 확대되고, 다채로운 스테인드 글라스가 창에 끼워졌다. 이 시대의 유리는 옛날의 ‘밝은 전망’과는 반대로 외계로부터 빛을 차단하여 천국과 같은 공간을 만들기 위한 디자인이었다.
유럽은 르네상스 시기부터 무역상은 상점 밖에다 눈에 띄는 간판을 내걸었다. 이때부터 전시의 방법이 주요한 요인으로 등장하였고, 문자 수공예 사인 기장 문장이 폭넓게 사용되었으며, 유명한 예술가가 상점이나 관청의 간판 디자인을 하는 일도 비일비재했다. 윈도 디스플레이도 이즈음부터 등장하였으며, 디렉트 메일도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15세기에 쿠텐베르크가 금속활자를 발명하자 정보를 지구의 어디든 또 세대를 넘어 정확히 전할 수 있게 되었다. 이로써 광고 분야에서도 혁명이 일어나 세계적인 스케일로 배 보되 었고, 인쇄산업을 육성시켜 시각 교육에 앞장섰다.
한편 회화도 사상의 전환에 큰 역할을 했는데 인간 하늘 물 나무 실내 같은 환경을 나타내는 데 가장 적합했으며, 특히 레오나르도 다빈치는 인간과 환경의 관계를 원근법에 의해 탁월하게 표현해냈다. 이리하여 회화의 세계는 비로소 이론적으로나 실제적으로 본 궤도를 찾았다. 그리고 회화는 신학에 속박되지 않고 자유로운 정신활동으로 자리 잡았으며, 자율적이고 동시에 자연법칙을 객관적인 방법으로 파악하려는 르네상스 시대 사람들에게 안내역을 했다 할 수 있다. 르네상스의 조형은 그대로 과학 발전의 한 페이지를 장식하였으며, 레오나르도의 투시에 관한 법칙 연구나 응용은 실험 광학적으로 주목할 만한 업적이었다.
한편 중세의 조형은 인쇄술의 실용화에 수반하여 판화 분야에도 눈부신 발전을 가져왔다, 이리하여 대중의 요망에 따라 섬세한 선의 판화가 생겨났다.


4. 공업사회에서의 디자인
18세기부터는 수공업이 아닌 기계로의 생산 생산력을 증대시켰고, 자본주의 생산체계를 확립시켰다. 따라서 교육도 인간적이고 창조적인 측면을 무시한 교육이 이루어졌으며, 자유로이 생각한다든가 자기를 표현하는 것은 거의 불가능해졌다.
18세기 전반에 걸쳐 기계와 조형에 매달린 영국인으로 생각을 새롭게 한 사람은 웨지우드였다. 그는 손재주에 의해 만들어지던 도예를 기례로 생산하는 방법을 구상해내 싼 원가로 도자기를 만들어낼 수 있게 되었고 판매 대리점 조직까지 좌지우지할 만큼 현대적인 디자인을 창작해냈다.
이 시대부터 미술은 일반조형에서 구분되어 부유한 상인 정치인의 증가와 민속문화의 증대에 따라 회화는 일종의 상품화, 즉 액자에 집어넣어 실내 장식품으로 걸리게 되었다. 그 때문에 미술의 의미를 진정으로 이해하려는 사람은 점차 줄어들었다. 그러자 화가들 사이에서 이성이나 고전에 반대하는 경향이 높아졌고, 꿈이나 시상의 세계를 나타내는 낭만주의 회화가 등장했다. 한편 사진술의 출현에 의해 회화는 자연을 기록하는 역할을 잃고 말았다. 여기서 인상파라는 새로운 회화가 탄생하였는데 인상파의 특징은 색채의 표현을 추구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인상파에 비해 사진기술은 대중 속으로 쉽게 파고들어 카메라 잡지는 날로 부수가 늘어났고, 대중은 사진 보도의 객관성과 신빙성을 과신하고 대사건 때마다 보도사진의 특성은 살아났으며, 정보사회의 단단한 밑바탕이 되었다, 이로서 화가들도 사진을 이용하여 풍경화나 초상화를 그렸고, 사진을 바탕으로 미술작품을 제작하기도 했다.

 


5. 정보사회에서의 디자인
공업의 발전으로 기업 간의 경쟁은 증대하였고, 생산보다 판매에 치중해야 했는데, 생각보다 빨리 대량소비의 시대가 시각 소비의 시대와 더불어 닥쳐왔다. 그런데 근대 디자인 센스의 대부분은 시각 소비의 시대가 시작되면서부터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현대는 직인시대처럼 실제로 손을 움직여 컨트롤하는 게 아니라, 시각화된 디자인에 의해 컨트롤된다, 따라서 근대 디자인 속에는 판매 전략이 짙게 강조되어 있다.


(1) 미술공예 운동
러스킨은 당시 산업혁명의 결과로 나타난 자연파괴, 기계로 인한 제품의 범람, 수공예 기술의 저하를 비판하였으며, 특권계층에게만 이윤을 주는 기계를 파괴해야 한다고 부르짖었다, 도 산업에 의한 사회의 무질서를 바로잡기 위해 미술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는데 이 점을 자극받은 모리스는 산업 예술품의 과잉 장식 디자인이 싫어 스스로 가구를 만들기로 했다. 그는 성실 미가 넘치는 수공예품 애용을 권장하고, 기계에 의한 노동을 윤리적인 입장에서 통렬히 비판하였다. 이 운동은 공예를 예술의 수준으로 높이고, 사회개혁운동으로 전개시켜 미래 디자인 운동의 시금석이 되었다, 실제로 모리스의 작품은 독일 공작 연맹이나 바우하우스의 조형활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2) 아르누보
1890년경까지 대부분의 예술가는 대량 생산된 제품에 매력을 느끼는 대중의 취미를 저속하고 비예술적이라 경멸하고, 그것을 초월하는 것이야말로 참예술을 아는 길이라고 주장하였다, 이를 극복해보려 노력한 화자가 이반 데 벨 데였는데 그는 1896년에 미술상인 빙그로부터 상점의 인테리어를 의뢰받아 곡선을 위주로 한 장식을 곁들여 주복을 끌었다. 빙그는 이 상점을 아르누보, 즉 신예술 양 식리라 불렀는데, 이때부터 화려한 색채와 더불어 추상 형식의 장식이 유행하기 시작했다,
이런 경향은 1895년부터 20세기 초반까지 프랑스 영국 미국 스페인 등에 널리 퍼져나갔다, 그러나 기계제품은 철저하게 장식을 받아들이지 않았고, 카메라의 출현으로 회화를 허둥대게 만들었으며, 그로 인해 고갱이나 고흐를 내면적인 상징 작가로 만들었다. 그러나 아르누보의 또 다른 의미는 철이나 콘크리트 같은 재료를 적극적으로 이용하였다는 점이다, 당시까지 단순한 보조재료에 지나지 않던 철을 조형의 주역으로 클로즈업시켰으며, 새로운 시대는 기계만이 판치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식시켰다.


(3) 19세기 후반의 회화와 그래픽 아트
세잔은 자연은 원주 구 원뿔로 이루어졌다는 결론을 내리고 훗날 입체파 구성의 기초가 되었다, 이 진보적인 조형은 그래픽 아트의 세계에 가장 강한 영향을 미쳤다, 미묘한 색의 배합이나 분위기의 변화를 묵살하고, 평면상에서 면과 면의 대비에 의한 구성을 함으로써 당신의 인쇄 특성에 맞았기 때문이다. 이때 영국에서는 자유로운 형식의 그림엽서가 유행하고 정교한 원색 인쇄가 개발되어 인기스타의 사진 엽서가 등장하는 등 커뮤니케이션의 역할을 톡톡히 하였다.

 

(4) 독일 공작 연맹 결성
1906년 독일에서는 종래의 독창적인 제작에서 기계 생산에 적합한 조형을 찾는 의식이 높아졌다,
그때 무테지우스는 신시대의 조형 창조는 ‘영국식’을 따라야 한다고 하고 소수의 제조업자와 건축가 예술가 저술가들에 의해 독일 공작 연맹을 결성하였다. 그리고 1911년 그는 규격화를 주장하고, 규격화가 될 때 비로소 대중의 취미도 향상될 수 있고 상품의 양질 화도 가져올 수 있다고 말했다.

 

(5) 20세기 초반의 조형활동
세계대전 중에 조형분야에서는 여러 가지 운동이 폭발적인 기세로 전개되었는데 이 모든 조형 운동의 초점은 전통적인 인습을 완전히 배제하고 새로운 시각 디자인을 원리로 삼아 참신한 출발을 하는 데 있었다, 이 운동의 영향은 오늘날의 그래픽 디자인이나 타이포그래피에도 남아있다.
입체파는 2차원의 평면을 충분히 살리기 위해 투시 화법에 의한 입체도형의 표현을 부정하였지만, 자연과 완전히 분리되는 것을 두려워해 꼬레 수법을 고안해냈다.
미래파의 중심인물은 이탈리아의 시인 마리네티였는데 反(반) 철학적 논리 아래 물질문명을 찬미하였으며, 전쟁이나 혁명, 현대 생활, 스피드 등을 감각적으로 표현했다.
미래파는 활자 디자인의 변화에 의해 글자도 그림과 대등한 조형요소라는 시각 디자인의 근본적 사상을 엿볼 수 있다. 이 그룹은 콜라주나 포토 몽타주 등의 기법을 사용하여 풍부한 시각 커뮤니케이션 분야에 새로운 길을 열었고, 이들 기법은 이미지의 경험을 시각화하는 방법으로 현재도 자주 사용되고 있다.
19세기 말 경부터 모스크바의 예술 애호가들은 유럽의 전위예술에 주목했고 회화의 절대주의, 즉 회화에서의 모든 재현 요소를 제거하고, 단순하고 순수한 화면 구성을 제창했다. 1917년 10월 혁명 때 전위적인 예술가와 디자이너들은 정치 저인 행사에도 적극 참가했고, 노동조합과 협력하여 전시회의 포스터, 슬라이드, 우표 등을 디자인하였고, 신설된 노동자 그룹을 기하학적인 오브제로 장식했다. 이들 오브제는 대량생산에 의해 만들어진 인공적인 소재로 구성되었고, 종합 예술을 하려면 객관적으로 디자인하여야 한다는 것이 그들의 주장이었다, 그러나 입체조형이 자본주의의 퇴폐적인 표현이라고 여긴 데서 생긴 트러블로 이들은 해체하였다.
독일에서는 철근이나 콘크리트 같은 새로운 소재가 벽돌을 대치하는 현상이 일어났고, 네덜란드의 디 스틸 경향에 압도되어 급속히 신소재 쪽으로 흘러갔다.
실내 디자인이나 책의 디자인도 종래의 균형을 깨트리고 정방형이나 장방형, 원색 회색으로 구성하는 특징을 보였다. 그리하여 타브로의 회화는 종막을 고하였고, 환경 자체가 회화라는 추상적 리얼리티의 비전이 바우하우스의 조형 사상에 큰 영향을 주었다. 이것은 현대 시각 시대의 있어 디자인의 핵심 요인이라 할 수 있다. 

 

(6) 바우하우스의 등장
그로피우스는 1919년에 미술 아카데미와 공예학교의 운영을 위촉받아 두 학교를 통합한 새로운 ‘바이마르 국립 바우하우스’라는 교육기관을 설립하였다. 바우하우스의 출발점에는 표현주의적인 로맨티시즘 분위기가 짙게 깔려 있었으나, 그 밑바닥에는 교육방법과 생산조직을 통일하려는 목적이 더욱 강하게 깔려 있었다. 그는
제1기 바우하우스의 중심인물 이텐은 자연의 세밀한 연구나 소재의 표현이 독특한 유명 회화의 분석에 온 힘을 쏟았고, 자유로운 구성과 형태 공간 색채 재질 감각을 익히는 학습을 펼쳤다.
그 후의 알버스는 기초교육 과정에서 재료와 도구에 익숙해지는 공작 실습과 자연과 조형요소를 익히는 실습을 담당했고 재료의 잠재적인 가능성을 발견하고 객관화하는 방향으로 교육했다. 나기는 자연의 법칙과 최소저항의 법칙을 학생들에게 가르쳤다.
제2기 바우하우스는 조형대학으로 그 성격도 디자이너를 양성하는 것이 주목적이었다. 디자인은 단순한 발상이나 착상만이 아니라, 기계에 의한 공장 생산과 거기서 생산되는 품질 모두를 처음부터 계산해서 반복이 가능한 모델 타입을 만들어냈다,
제3기 하네스 메이어 학장은 예술은 집단 사회의 표현이라는 전제 아래 모든 사람이 알아보기 쉽도록 건축의 기본 선을 정했다.
그러나 1933년 바우하우스는 완전히 해산되었고 미국으로 이주한 그로피우스 등은 시카고에 ‘뉴 바우하우스’를 탄생시켰다.


(7) 미국의 디자인
19세기 후반의 유럽 디자인은 전통과 아카데미즘에 대응한 창조를 배경으로 전개하였으나 미국에서는 그런 구조적 저항이 없었다, 따라서 미국 사회가 요구하는 실용성을 중심으로 활발하게 전개되었다.
그 과정은 편리한 것이 발명되면 그것에 연결하여 또 다른 것이 창조되는 식으로 주택의 내부 공간도 주부를 중심으로 디자인되었다.
그리고 플라스틱의 발명으로 나기는 빛을 색으로 또는 색을 빛으로 창조하는 한편 불투명하고 균등한 채색과 실제적인 면을 지닌 이 매개에 굉장한 매력을 느낀 그는 무대 디자인이나 영화에서 이 빛으로써 큰 효과를 보았다.
그로피우스는 미국으로 이주한 뒤 1928년 스위스에서 CIAM(근대 국제건축가 회의)를 결성하고 오늘의 젊은 건축가 그룹인 ‘팀텐’을 육성해갔다.
미국 광고대리점협회가 발족하고 과학 저인 시장조사에 의한 소비자의 구매 동기, 제품의 색채, 모양의 판매 효과 등을 끊임없이 평가하였고, 대중 기호의 흐름을 알아내어 광고의 안내문이나 유혹하는 카피 작성의 아이디어로 삼았다.

 

(8) 20~30년대의 유럽 디자인
유럽에서는 광고 디자인으로서 객관적인 정보내용의 커뮤니케이션을 노리는 경향이 현저해졌다. 때문에 사진이 자주 사용되었고, 읽기 쉬운 꼴의 타이포그래피가 사용되었다.
얀 취홀트는 비대칭적인 질서 있는 배치에 의해 활자 전체의 다이내믹한 시각효과를 만들어냈다. 그리고 필요성에 의하여 시각적 심리적인 법칙에 따라 결정하고 사진이나 일러스트레이션과 일체화된 표현을 중시하여 디자인하였다.
올리베티는 진보적인 디자인 아이디어가 유럽의 규범이 되었는데 시종 일고나 세련된 디자인 수준을 지켜 그 영향은 현재까지도 남아있다. 그리고 공장의 근로자나 사무원의 후생시설에도 새로운 경향이 나타나고 팸플릿이나 카탈로그 포스터나 신문광 고의 조형적 표현도 세련되었고 패키지 외의 내용도 언제나 한 걸음 앞서 인식하였다.
막스 빌은 이론을 중시한 디자인을 시도해 수학적 비례를 적용하여 객관적이고 치밀하고 안정감이 있는 디자인을 만들어냈다.


(9) 20세기의 디자인과 미래
20세기는 회화의 조형적인 전통을 점점 파괴해갔다. 지금까지의 투시화 법적 시각 개념은 퇴색해졌고, 실내장식적 회화를 부정하는 경향이 명확해졌다, 모두가 전통을 부정하고, 한결같이 새로운 출발을 주장하며, 끊임없이 변혁을 시도하였다.
한편 1920~30년대에 라디오와 텔레비전 등 새로운 매체가 등장하자 이에 따른 실용성의 심리 효과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측정 분석되었다. 이로써 광고산업은 폭발 저인 기세로 증가했으며, 디자인은 판매촉진의 매우 중요한 수단으로 부각되었다.
디자이너는 예전의 예술가나 직인들이 하던 일이 아니라, 과학적인 분석 방법과 고상한 디자인의 이론을 갖고 그에 근거하여 제품의 모양을 고안하고 설계하였다. 따라서 건축설계가나 공업 디자이너는 시각화와 기호와의 활동이라고 볼 수 있다.
광고디자인은 시각을 통하여 대중에게 보다 많은 정보를 전달해야 했기 때문에 가능한 그 방법을 다양하게 동원했다.
각종 평면적 입체적인 시각화다 등장하고 시각에 호소하여 디자인되었을 뿐 아니라, 이들 각각의 매체에 있는 영상이 서로 강조되면서 감각적으로 연결되도록 계획되었다.
다큐멘터리 영화도 텔레비전의 스포츠 광고처럼 판매 증진을 위해 디자인되었다. 이처럼 시각 디자인은 교양 있는 현대인의 호기심 속에서 확고한 위치를 확대해갔다. 현대 디자인은 컴퓨터의 영향을 절대적으로 받고 있다, 이미 컴퓨터에 의해 2차원적 평면의 선도를 3차원으로 시각화하는 방법이 고안, 실용화되고 있다. 평면의 선도를 그리기만 해도 건축의 기능적 미적인 만족도까지 알 수 있다.
광고디자인의 변화는 더욱 변화무쌍할 것이다. 디자인은 한 가지의 능력을 초월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대중은 개인의 자유로운 의사에 따라 정보를 선택하는 시대도 올 것이다. 그런 경우 디자이너에게는 보다 넓은 지식과 객관성이 요구될 것이며, 끊임없이 노력해야 할 것이다.
광고디자인은 신뢰성과 정확한 정보를 전하지 않으면 소비자는 이를 외면할 것이며, 그 기업도 성장하지 못하게 될 것이다. 오늘의 시각디자인은 미래 조형에 대한 문제만이 아니라, 높은 정보성을 만들어내야 하는 과제가 놓여있다, 그리고 디자이너는 사회적 문화적인 책임, 즉 리더라는 긍지를 가져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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