색채와 디자인의 역사

2020. 12. 26. 00:55무료공유파일/디자인관련정보

색채와 디자인의 역사



 
▶ The History of Color and Design



‘카사 바트요’ 디자인:

안토니 가우디, 1904-06 

18세기 말 스페인에 주권을 빼앗긴 카탈로니아는 스페인 지배에 대한 저항의 표현으로 몇몇 의식 있는 건축가를 중심으로 역사적 양식을 거부하는 경향을 보인다. 안토니 가우디도 그중 한 사람으로 세인의 이목을 사로잡는 분방한 색채와 화려한 장식 효과는 가우디의 건축을 어떤 범주로도 분류할 수 없을 정도로 독창적으로 만들었다.

그의 건축물 중 카사 바트 요가 각별히 세간의 사랑을 듬뿍 받는 이유는 마치 과자로 만들어진 동화 속의 집을 보는 듯한 착각을 불러 일으키는 카사 바트요가 지닌 몽환적인 색채 효과 때문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듯하다. 인어공주의 무지개 빛 비늘을 연상시키는 듯한 지붕과 파사드의 모자이크 장식이 표현하는 환상적인 색은 살아있는 생물체 같은 표면과 너무나 인위적으로 완벽한 조화를 이루고 있기에 괴짜 천재 가우디의 재능이 그저 경탄스러울 따름이다.
도시 한가운데 자리 잡은 건물의 색채가 비현실적으로 영롱하기 때문에 느껴지는 일종의 환각효과 저편에는 역겨운 도시적 분위기가 제거된 머나먼 환상의 세계를 추구하는 아르누보의 현실 도피적인 퇴폐미가 약간은 묻어난다.

‘충만’, 스토클레 저택 식당의 장식벽화


구스타프 클림트, 1905-09
미술과 그래픽 디자인의 경계를 무너뜨린 구스타프 클림트의 작품은 한 세기가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대중적인 인기를 누리고 있다. 남다른 통찰력으로 표현해 내고 있는 관능성과 장식성 외에도 거의 클림트의 트레이트 마크처럼 되어있는 금박 장식의 신비함과 화려함이 그의 작품이 지닌 매력의 원천이다.

클림트가 금박을 작품의 주요 소재로 활용하게 된 이유로는 첫째, 보헤미아에서 이주해온 금세공사인 부친의 영향, 둘째, 1902-03년 피렌체 여행에서 접한 비잔틴 모자이크화에서 받은 강렬한 인상, 셋째, 일본 문화의 영향을 들 수 있는 데, 클림트는 당시의 예술가들이 그러했듯 일본의 목판화와 장식품은 물론 기모노와 노의상을 수집했다고 한다.

 이유야 어찌 됐든 금박 장식은 여성의 관능성을 극적으로 표현해 내기에 적합했고 광택 있는 골드 마감은 이국적인 화려함을 추구하던 당시 비엔나 귀족들에게 어필했다. 그의 화려한 금박장식은 단조롭고 획일적인 문명에 장식적이고 화려한 숨결을 불어넣음으로써 병적인 에로티시즘과 화려함이 절정에 달했던 비엔나 문화의 세기말적인 분위기를 물씬 풍긴다.

 

‘모델 T’
디자인: 헨리 포드, 1908
1851년 런던 대영 박람회에 출품된 미국 제품들의 기능주의적 특성에서 이미 드러났듯이, 미국의 규격화된 기술지향적 생산방식은 노동력 부족이라는 미국 특유의 노동시장 조건 및 지식에 대한 방법론적 접근을 강조하는 프래그머티즘이라는 미국적 철학 체계와 맞물리어 그 어느 나라에서 보다도 대량생산 시스템을 효과적으로 발전시킬 수 있었다.

이 미국적 대량생산 방식의 상징이 바로 1908년부터 1927년 사이에 1,600만 대가 생산된 포드 ‘모델 T’이다. 기능주의 원리에 입각해 철저하게 대량소비시장을 겨냥해 디자인된 단일 차종의 ‘모델 T’는 대량생산과 대량 판매에 성공하여 1920년 경에는 전 세계 자동차 시장을 석권할 수 있었다. 당연하겠지만 자동차 컬러는 검정, 단 한 컬러뿐이었다. 실용성과 경제성이라는 합목적성 앞에서 자동차의 색채는 한낮 부수적인 가치로 폄하되었던 것이다.


그러나 ‘모델 T’의 신화는 192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대공항이라는 경제적 전환기에 이르러 좌절된다. 불황기의 극심한 경쟁으로 인해 생산주의 원칙이 판매 주의 원칙으로 대체되었을 때 구시대 표준화 이념의 산물인 검정은 침체된 시장에서 판매 심리를 유발할 가능성이 있는 다양한 종류의 색채에 자리를 양보해야만 했다. 이후 미국 자동차 산업은 소비자를 유혹할 수 있는 것이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핑크색이 한창 유행했던 1950년대, 포드 자동차 역시 핑크색 옷을 입기를 마다하지 않았음은 물론이다.



1910

 

‘천남성(Jack-In-The-Pulpit)’, 꽃병
디자인: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 1912
미국에서 가장 유명한 아르누보 양식 디자이너 중에 한 사람인 루이스 컴포트 티파니는 30년이란 세월에 걸쳐 유리에 대한 연구를 거듭한 끝에 마침내 어떤 빛깔의 유리도 자유자재로 만들 수 있는 노하우를 축적할 수 있었다.

특히 ‘파브 릴’이라는 이름으로 특허를 낸 유리제품은 현기증이 날 정도로 환상적으로 어울려진 색상을 연출했다. 아롱거리는 무지개 빛 효과를 연출하기 위해 가열실에서 유리판에 금속 증기 분무액을 뿌려 영롱한 빛이 감도는 표면처리를 했다. 이 과정을 거치면서 유리는 변화무쌍한 광택을 띠게 되었고 이는 곧 티파니 제품의 특징이 되었다.

적청 의자
디자인: 게리트 리트벨트, 1917-18
게리트 리트벨트의 적청 의자는 찰스 레니 매킨토시의 ‘힐 하우스 의자’와 더불어 대중들에게 가장 사랑을 많이 받은 의자다. 리트벨트는 삼원색과 흑백, 수평, 수직선만을 사용해 보편적 진리에 이르고자 하는 데 스틸 운동의 요소 주의를 적청 의자를 통해 대칭적인 구조로 깔끔하게 재현해냈다. 무엇보다도 적청 의자의 가장 큰 매력 포인트는 등받이와 시트, 프레임의 끝부분을 빨강, 노랑, 파랑으로 칠한 원색 대비에 있다. 오죽하면 명칭이 ‘레드-블루 체어’일까?


명성만큼이나 적청 의자에 대한 비판도 끓이지 않는다. 침대가 과학이라면 의자도 과학일 텐데, 인체공학적 측면에서 적청 의자는 거의 절망이란 목소리가 높다. 뚱뚱한 사람이나 임산부들은 한 번 앉으면 다른 사람의 도움 없이는 빠져나올 수 없는 이상한 나라의 의자라는 것이다. 또 다른 이는 ‘적청 의자’에 앉는 사람은 허벅지가 네모나야 한다는 심한 말도 서슴지 않는다.

차라리 이 정도의 빈정거림은 애교에 속한다. 순수예술작품인 피에트 몬드리안의 2차원 회화를 3차원으로 부풀려 놓는다고 해서 결코 의자가 되는 것은 아니라는 비판은 어쩌면 리트벨트의 명성에 가장 심각한 타격을 주는 비판이 아닐까?



1920 

 

바우하우스 내부의 벽화 디자인
디자인: 헤르베르트 베이어, 1923
1920년대 바우하우스에서는 삼원색과 사각형, 삼각형, 원과 같은 기본적인 기하학적 형태 사이에 모종의 관련이 있다는 이론이 제기되었다. 즉 빨간색과 사각형, 노란색과 삼각형, 파랑색과 원이 매치된다는 것이 그것이다. 이 이론은 더 나아가 관련 있는 형태와 색상을 함께 사용할 경우에는 그 효과가 배가되는 반면 관련 없는 색과 형을 조합하면 그 반대가 된다는 가설로 확대되었다.

요하네스 이텐 쪽에서 먼저 제안한 색채-형태 상관관계에 대한 이론은 바실리 칸딘스키나 폴 클레, 헤르베르트 베이어 등의 관심을 끌었다. 마침내 헤르베르트 베이어는 1923년 개최된 바우하우스 전시회에 맞춰 바이마르 바우하우스 건물 계단 옆의 빈 벽 공간에 3층짜리 벽화를 설치할 때 이 이론을 적용했다. 1층에는 파란색 원, 2층에는 빨간색 사각형, 3층에는 가장 가벼운 색깔인 노랑색 삼각형으로 디자인했다.



1930

 

블루 문 라디오
디자인: 월터 도윈 티그, 1935
미국의 1930년 대는 경제적, 사회적으로 위기의 시대였다. 미국 전역에 대공항이 몰고 온 음산함이 깊어질수록 그들에겐 희망이 필요했다. 소위 ‘아메리칸드림’이 그것이다. 이제 미국은 하나의 거대한 꿈의 제조공장이 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한편에서는 할리우드 영화가, 다른 한편에서는 산업 디자이너가 그 꿈을 대행해주었다. 노만 벨 게데스나 헨리 드레이퍼스, 레이몬드 로위, 해롤드 폰 도렌, 월터 도윈 티그, 도날드 데스키 같은 당시의 디자이너들은 헐리우드 스타와 다름없는 위치에 있었다.

행복이라는 이름의 환상을 전도하는 헐리우드 스타의 역할 모델을 스타급 디자이너들은 제품에 낙관적인 이미지를 부여함으로써 충실히 수행했다. 그리고 사람들은 실제로 그 제품을 소유함으로써 현실의 고난을 미래의 희망으로 치환시킬 수 있었다. 이제는 디자인 마케팅 원리의 ABC가 된 이 현대판 면죄부의 구체적인 예가 바로 월터 도윈 티그의 ‘블루 문 라디오’이다.

티그는 제품 이름이 지닌 ‘파란 달’의 의미를 직유적, 은유적으로 전파하고 있다. 라디오의 파란색과 동그란 형태가 파란 달을 지칭하는 직유적 시각 기호라면, 현실세계에는 결코 존재하지 않는 파란 달이 상징하는 초 현실적이고 꿈같은, 로맨틱한 세계를 은유적으로 암시하고 있는 것이다. 얼어붙은 시장을 녹일 수 있는 꿈과 같은 감각적인 색채와 억제된 소비 욕망을 자극시키는 꿈과 같은 매력적인 형태는 소비가 곧 미덕이며, 심지어는 애국적인 행위로까지 여겨졌던 그 당시 산업 디자이너들의 명제이자 또한 윤리이기도 했다.



1940


러키 스트라이크 담배 갑
디자인: 레이몬드 로위, 1940-42
20세기 초만 해도 예술가 등 특수계층의 사람들을 빼고는 아직 담배가 일상적인 기호품 반열에 오르지 못했다. 점차 담배가 대중화되자 1916년에 ‘러키 스트라이크’ 담배가 미국시장에 첫 선을 보였다. 1930년대에 이르자 럭키 스트라이크는 남성에 비해 담배 소비량에 있어 비교가 안되던 여성을 겨냥하는 광고전략을 폈는데 그것이 적중했던 때문인지 더 역사가 오랜 ‘카멜’ 같은 브랜드를 제치고 시장 점유율 1위로 올랐다.

그러나 패키지만은 처음 나올 때 그대로였다. 마침내 1940년 ‘마이더스의 손’을 지닌 레이몬드 로위에 의해 새로운 디자인 작업에 들어갔으며, 1942년에 컬러를 수정한 후 지금까지 같은 디자인을 유지하고 있다. 오리지널 패키지는 짙은 녹색 바탕의 정 가운데에 빨간색 원이 위치한, 마치 활을 쏘는 과녁과 같은 느낌을 주었으며, 한 쪽면에만 트레이드마크가 인쇄되어 있었다.

로위의 역할은, 언제나 그렇듯이, 브랜드의 지명도를 향상하기 위해 트레이드마크를 양면에 똑같이 인쇄한 것 외에는 원본의 이미지를 약간 정리하여 깨끗하고 모던한 이미지를 첨가하는 수준에 불과했으나, 판매 효과에 있어서는 하늘과 땅 차이만큼이나 전혀 다른 제품이 탄생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제는 클래식한 색채조합의 대명사가 되다시피 한 러키 스트라이크의 밝은 빨강과 눈부신 하양의 신선한 컬러 콤비네이션은 오늘날까지 디자이너들의 뇌리 속에 성공적인 색채 조합의 전형으로 각인되어 있다.

 

‘월리처 주크박스 1015’
디자인: 폴 풀러, 1946
1930년대 말부터 40, 50년대에 걸쳐 인기를 끌었던 주크박스 디자인을 보면 한결같이 색채가 요란하며 몸집이 크고 시각적으로 복잡하고 야한 느낌이 난다. 주크박스의 이런 특징을 더욱 극대화시킨 사람이 주크박스 디자인의 귀재라고 알려진 미국의 폴 풀러이다.

‘월리처 1015’는 그가 만든 주크박스 중에서 가장 명성이 높았던 디자인으로, 1946년부터 47년 단 1년 사이에 56,000대가 팔려나갔다. 풀러의 디자인은 색채와 조명을 강조하여 감각적으로 어필할 수 있도록 만드는 것이 특징이다. 화려한 색의 플라스틱 패널 속에 조명을 장치하고, 많은 경우 그것을 회전시킴으로써 훨씬 육감적인 느낌의 색채 효과를 얻을 수 있었다. 흥미로운 점은 ‘월리처 1015’가 자랑하는 색채와 디자인이 정확히 ‘굿 디자인’의 반대편에 위치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70년대 이탈리아 알키미아 그룹이 의도적으로 타파하고자 한 모던 디자인의 고상한 미학은 눈곱만치도 가지고 있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알키미아의 반항을 일거에 잘라버린다. 말하자면, 원조 키치 디자인인 셈이다. 80년대 피오루치 사의 색채를 연상케 하는 ‘월리처 1015’를 보면 역시 키치의 구성요소 속에 색채가 담당하는 역할이 중요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같은 형태라도 흰색이라면 이미지는 훨씬 달랐을 것이다. ‘월리처 1015’의 천박하기까지 한 색채와 형태는 이른바 ‘굿 디자인’의 개념에 대해 다시 한번 고민하게 만든다. 이것이 굿 디자인의 반대편에 위치하기는 하지만 그렇다고 ‘베드 디자인’은 아니다. 왜 굿 디자인은 사용자들이 즐거워하는 요소를 담보로 존재할 수밖에 없는 것일까?



1950

 

나무 접시
디자인: 타피오 비르 칼라, 1951
1952년 1월 <하우스 뷰티플> 지는 핀란드 디자이너인 타피오 비르 칼라의 나무 접시를 1951년의 가장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선정했다. 나무 접시는 나무로 만든, 나뭇잎 형태의, 나무의 색채가 숨김없이 고스란히 드러나는 접시로서 인위적인 디자인 요소를 최대로 억제한 가장 자연적인 제품이다. 진한 색과 흐린 색 베니어 목재를 교대로 맞붙여서 생긴 섬세한 선들은 마치 나이테 인양, 또는 지층 인양 시간과 자연의 변화를 이야기하는 듯하다. 왜 이 별로 눈에 띄지 않는 소박한 나무 접시가 다른 현란한 신제품들을 누르고 최고로 아름다운 오브제로 선택되었는지의 이유를 조금은 알 것 같다. 좁게는 핀란드가 일찍이 배출한 세계적인 디자이너인 알바 알토의 1920, 30년대 합판 가구가 지닌 오가닉 한 미학의 연장선상에서, 넓게는 공예적 프로세스를 산업적 생산에 통합시키는 스칸디나비아 디자인 특유의 인간적인 미학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1960

 

맥도널드 로고
디자인: 짐 쉰들러, 1962
1955년에 맥도널드 형제의 햄버거 레스토랑에서 시작된 맥도날드 프렌차이즈 레스토랑은 오늘날 세계 52개국에 11,500개가 넘는 체인점을 갖고 있는 패스트 푸드점의 대명사가 되었다. 맥도날드의 노란색 로고는 흔히 맥도날드의 이니셜인 ‘M’ 자에서 따온 것으로 알고 있으나, 사실은 1962년 짐 쉰들러가 맥도날드 레스토랑 양 옆에 세워진 아치 형태의 사인 물에서 힌트를 얻어 아취 둘의 모습을 결합하여 오늘날 세계적으로 유명해진 ‘M’을 디자인한 것이다.

이전 로고가 풍기는 싸구려 인스턴트 음식점 이미지보다 좀 더 세련된 기업 이미지를 표현하고자 새로 개발한 디자인이지만, ‘M’의 세련되지 않은 서체 스타일은 실패한 사인물의 대표적인 예로 혹평받고 있는 것이 사실이다. 맥도널드 로고의 노란색은 결코 품위 있는 컬러라고 말할 수는 없겠지만 주목성이 뛰어나서 멀리서도 눈에 잘 띄며, 시장한 사람에겐 갓 튀겨낸 프렌치 프라이를 연상시키고, 특히 어린이들이 좋아하는 색상이라서 아이들을 매장에 끌어들이는 데는 이보다 더 효과적인 색도 없을 것이다. 어쨌든 맥도날드 매상의 가파른 상승은 노란색 ‘M’을 매장 정문 앞에 서있는 어릿광대 캐릭터 로날드와 함께 세계에서 세 번째로 유명한 디자인 상표로 만들었다.

상 크리스토발 농장
디자인: 루이스 바라간, 1967-68
상 크리스토발은 멕시코 시티에 위치하고 있는 농장이다. 60년대 팝 컬러의 영향을 받은 듯한 핑크와 보라, 적갈색으로 둘러싸인 벽 중에서 한 쌍의 입구가 넓게 뚫려있는 핑크 색 담벼락이 단연 압권이다. 왜냐하면 핑크 색 벽은 엄청난 파격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멕시코 농장의 분위기를 천국의 앞마당 같은 고요함으로 승화시키는 어떤 힘이 핑크 색에서 나오고 있다. 금방이라도 물이 들 것 같은 멕시코의 쪽빛 하늘과 앞에 넓게 펼쳐진 야트막한 인공호수가 어우러진 결과겠지만 핑크 색이 이렇게 고요한 색인지 예전엔 미처 깨닫지 못했다. 그렇게 파격적인 핑크 색 벽이 마치 시간이 정지한 듯한 신성함을 안겨주는 것은 색채가 지닌 콘텍스트 성이 아니고 무엇이랴? 색채는 결코 그 색채를 둘러싸고 있는 콘텍스트를 떠나 단독으로 존재하지 않는다.



1970


베스트 쇼룸
디자인: 사이트 아키텍트 그룹, 1972
사이트 아키텍트 그룹은 마치 ‘이것은 파이프가 아니다’라고 한 르네 마그리트의 언술 행위를 패러디하여 ‘이것은 벽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 것 같다. 그림 속의 파이프가 실제 파이프가 아니라 파이프의 기호, 즉 파이프를 그린 그림이듯이, 철근 콘크리트 공법을 사용하는 현대 건축에서의 벽은 이제 더 이상 진짜 벽이 아니라 단지 벽의 기호, 즉 파사드일 뿐이다. 사이트 그룹이 벽의 전형으로 재현한 재료는 공교롭게도 빨간 벽돌이다.

디자인사를 의식하는 이들에게는 이미 난 익은 기호가 아니던가? 위상학적으로 모리스와 웨브의 ‘빨간 집’이 지닌 색채 이데올로기의 반대편 사이트에 ‘베스트 쇼룸’이 위치하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피상적인 기존 디자인 문화의 허를 찌르는 해체주의적 태도 속에서 사이트의 해학적 빈정거림과 미술공예 운동의 강박적 정직함이 지향하는 이념적 공통분모를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바디숍 물류운송 트럭
디자인: 바디숍, 1976
“세계의 화장품 시장의 역사를 다시 쓰고 있다”는 명성을 얻고 있는 바디숍의 철학과 경영전략은 많은 사람들의 연구대상이 되고 있을 정도로 가히 혁신적이다. 그런데 바디숍의 혁신성이라는 것이 어찌 보면 전혀 새로울 것이 없는, 가장 소박한 삶의 태도에 근거한 혁신이라서 아이러니이다. 역시 진리는 진실과 통하는 것, 먼 곳에 있는 것이 아니라 바로 우리 곁에 있는 것, 거창한 것이 아니라 하찮은 것, 추상적인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생활 속에 있는 것이라는 것이 궁극적으로 바디숍이 소비자에게 던지는 메시지이자 성공 비결인 것 같다.

환경을 콘셉트로 하는 회사인 만큼 녹색이 중요한 색채인 것은 너무나 당연하다. 바디숍 물류운송 트럭의 경우 녹색이 본래 지니고 있는 자연과 관련된 기호성을 아무런 기교 없이 솔직 담백하게 활용하고 있다. 심지어는 대형 트럭의 널찍한 옆면을 이용해 대중들을 계몽까지 하고 있다. 한 구석에 있는 바디숍 로고만 없다면 녹색 바탕에 흰색 서체로 확실하게 전달하고 있는 메시지가 자회사 광고인지, 공익광고 내용인지 좀처럼 구별이 안된다. 유일한 디자인 요소라면 가시성과 가독성뿐인 탈-디자인적인 녹색 트럭은 바디숍의 그린 디자인 철학을 아무런 노이즈 없이 선명하게 보여준다. 마샬 맥루한의 ‘미디어는 메시지다’라는 말은 뒤집으면 ‘메시지는 미디어다’가 된다. 메시지가 진짜인데 무슨 디자인이 또 필요하겠는가? 바디숍은 소비자에게 진실을 파는 기업이지 꿈을 파는 기업이 아니다.



1980


QT-50 포터블 스테레오 카세트 레코더
디자인: 샤프 디자인 부, 1985-86
일본 디자인의 특징인 경박단소에 대한 색채적 대응은 아마도 파스텔 색조가 아닐까 한다. 파스텔 색은 서구와 달리 귀여운 미학을 선호하는 일본 디자인의 아이덴티티를 표현하는 데 효과적이다.

더구나 그것이 딱딱한 이미지를 가진 종래의 가전제품 디자인에 적용될 때 더욱 그러하다. 모서리를 둥글린 1940-50년대 제품을 연상시키는 복고 스타일의 유선형 형태와 덜 성숙한 소녀 취향의 아이스크림 컬러의 결합은 당시 서구 가전제품에서 흔히 볼 수 없었던 장난감 같은 친근한 매력을 불러일으켰다. 본래는 일본 청소년 시장을 타깃으로 디자인되었던 QT-50이 국제시장에서 거둔 의외의 성공은 금속과 블랙 위주의 한정된 색조에 만족하고 있던 다른 디자인 회사들의 색채계획에도 영향을 미쳤다.

‘빌보드 프로젝트’
바바라 크루거, 1989
바바라 크루거가 아티스트인지 혹은 그래픽 디자이너인지에 대해서는 논란의 여지가 있다. 하나 분명한 사실은 그래픽 디자이너들이 그녀의 작품으로부터 많은 영향을 받았다는 것이다. 대담한 사회 비평적 메시지와 더불어 파격적으로 미니멀한 타이포그래피 스타일은 80년대 후반부나 90년대 초반부에 부쩍 대중적인 인기를 모은 해체주의 스타일 타이포그래피의 불투명한 복잡성에 식상한 그래픽 디자이너들에게 있어서 하나의 대안을 제시해 준 셈이 되었다. 크루거의 정치성 짙은 내용을 가장 효과적으로 전달하는 역할을 담당하는 시각장치는 바로 색채이다. 그녀는 색채의 사용을 무척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는데, 거의 모든 크루거의 작품은 검정, 하양, 빨강의 단 3가지 색으로만 구성되어 있다. 나치 엠블렘의 예에서도 드러나듯이, 검정, 하양, 빨간색의 구성은 가장 강렬하게 사람의 눈길을 끌뿐만이 아니라 마음조차 사로잡는 컬러 콤비네이션이기 때문이다.



1990

 

아이맥
디자인: 애플 디자인팀, 1998
새로운 개념의 파워 매킨토시 컴퓨터 아이맥은 모니터 일체형이며 키보드와 마우스, 심지어는 전원 케이블까지도 반투명 플라스틱으로 만들어졌다. 컬러풀한 반투명 플라스틱 케이스는 1990년대의 디자인 트렌드의 결정판이라고 해도 과장이 아니다. 아이맥 컴퓨터의 등장을 계기로 내부가 투명 또는 반투명으로 비쳐 보이는 플라스틱을 외피로 사용하는 제품이 늘고 있다. 내부가 보이는 투명한 제품이 물론 처음은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른바 누드 아이맥 디자인이 관심을 끄는 이유는 주로 실용적인 중저가 소품에 장난기 있게 적용되어온 방식을 컴퓨터같이 지적인 활동에 종사하는 신중한 이미지의 고급 제품에 유머러스하게 적용시킴으로써 컴퓨터의 인간화를 꾀했다는 데 그 의의를 찾을 수 있다. 누드라는 개념도 전혀 새로운 개념이 아님에도 불구하고 시의적절한 콘셉트였다고 할 수 있다. 세상에 가짜가 진짜보다 많고 누구한테도 속마음을 내비칠 수 없는, 그 어느 때보다도 진실을 위장하고 살아가야 하는 현대인들에게 누드 제품은 일종의 카타르시스적인 역할을 수행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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