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20. 12. 26. 00:11ㆍ무료공유파일/디자인관련정보
디자인의 이해
1. 디자인의 이해와 어원
디자인은 우리 일상에 가장 빈번히 사용하는 buzz word 중의 하나이다. 신문, 잡지, TV 보도 등 하루도 빠짐없이 디자인이라는 용어를 찾아볼 수 있다. 아침에 일어나서 저녁에 잠자리에 들 때까지 우리가 사용하는 많은 인공물(man-made object)들은 거의 모두 디자인의 산물이다.
그렇다면 디자인이란 무엇인가? 디자인이란 용어는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되는 경향이 있다. 그래서 디자인이란 용어를 명확히 정의내리는 것은 싶지 않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아직 디자인을 “스타일링(styling : face lifting or skin-deep)”을 디자인으로 이해하는 경향이 강하다. 즉 이런 스타일링의 개념으로 유행을 만들거나 따라가는 행위를 디자인으로 이해한다.
실지로 산업 혁명 이래로 인간환경(man-made environment)을 장식하려는 인간적 욕구와 관련지어, 조형적 특성을 인공물에 부여함으로써 욕구를 충족시키는 디자인의 단면이 강조되어 왔다. 그래서 19세기 중반부터 영국에서 생산품의 표피적 장식을 암시하는 “장식미술”이나 “응용미술”을 대체하는 용어로 디자인이 사용되어 왔다.
이렇게 디자인이란 용어의 사용을 살펴보면 정치가들은 정부 구조의 변경, 국토의 구획, 정계의 개편 등과 관계지어 “그랜드 디자인(Grand Design)"이라는 용어를 즐겨 사용하고, 엔지니어들은 새로운 제품을 만들어내기 위한 설계를 디자인이라고 칭한다. 도시 계획가들은 큰 도시나 거대한 지역 사회에 대한 계획을 수립하는 것을 디자인한다라고 한다. 이처럼 디자인은 전문 분야에서 각기 다른 의미로 사용되고 있는데, 그것은 이 용어가매우 함축적인 어원(語原)을 갖고 있기 때문이라고 볼 수 있다. 그렇다면 디자인의 어원을 알아보자.
디자인은 원래 라틴어인 “데시그나레(designare)”로부터 유래되었다. 데시그나레는 “to mark out"라는 의미로 ”경계선을 긋거나, 구획을 나누어 표시한다“라는 뜻을 갖고 있었다. 디자인의 사전적 의미는 ”설계하다, 입안하다 : 밑그림을 그리다 ; 도안을 그리다“등의 의미로 나열되어 있다. 이와 같이 다양한 의미를 내포하고 있지만 내포된 의미로 이해할 때 ”심적계획(mental plan), 전문적인 용어로 “지적조형활동 知的造形活動”이라는 뜻이 함축되어 있다. 이런 관점에서 이해할 때, 디자인은 마음속에 떠오른 생각을 실행하기 위한 계획을 세우는 것으로 정의내릴 수 있다. 이런 광의의 의미로 디자인을 이해할 때, 빅터 파파넥(Victor Papanek, 1992)은 디자인을 “사람들은 모두 디자이너들이다.......중략 .......디자인은 곧 의미 있는 질서를 만들어내기 위한 의식적이고 지속적인 노력이다.”라고 정의하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관점은 지나치게 포괄적이므로 협소의 의미로 디자인을 조형 활동이라는 관점에서 디자인을 정의한다. 실제로 1960년대 이래로 많은 사람들이 내린 디자인의 정의는 시대의 흐름을 막론하고 이와 같은 두 가지 측면이 극명하게 드러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즉 디자인의 정의를 “심적 계획”으로 간주하고 객관성과 비시각성이 강조되고 있는 반면, 어떤 학자들은 조형 활동이라는 측면에 중점을 두어 주관성과 시각성의 중요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하지만 너무 광의로 해석하는 것도 바람직하지 않고, 또 조형성에만 치중하는 것도 문제가 있다. 아무리 심미적 형태라고 할지라도 생산에 부적합하거나, 사용하기에 불편하면 가치가 없는 것으로 볼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디자인작업은 대부분 개인의 예술적 소양이나 자질보다는 전문가들로 구성된 팀에 의해 체계적인 연구결과로 만들어져야한다는 인식이 확산되고 있다. 디자인에 관한 최근의 정의를 살펴보면
디자인이란 인공물에 심미적, 실용적, 경제적, 문화적 가치를 부여하기 위해 visible적(조형성과 같은)인 측면과 invisible적(사용성과 같은)인 측면을 포함한 인공물에 가장 합당한 특성을 창출하는 지적 조형 활동이다.
2. 디자인과 문화 그리고 커뮤니케이션
디자인은 삶의 방식, 즉 문화를 담아내는 역할을 한다.
문화는 다른 사회 집단과의 상호작용에서 비롯된 삶의 총체적 방식으로 이해할 때, 각각의 디자인된 인공물은 개인적 취향이나 문화적인 현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다.
의복과 같은 경우도 인체를 보호하는 목적을 넘어서 심리적, 상징적인 의미를 지니고 있다. 예를 들어 과거 주술사의 복장은 몸을 보호하는 목적을 넘어 상징적 의미를 지니고 있고, 중세의 성당들은 하나의 상징으로서 당대의 삶의 방식과 이념, 기술수준 등의 단서를 제공해 주기도 한다. 즉 디자인된 인공물을 통해 삶의 방식을 표현하고, 또한 커뮤니케이션의 수단으로 새로운 라이프 스타일을 창출하기도 한다.
3. 디자인과 정체성 (개인, 기업, 민족..)
개인의 정체성
우리가각기 다른 라이프 스타일을 갖고 있는 것은 취향의 차이 때문이다.
이러한 취향의 차이 즉, 남과 구별되는 모습을 드러냄으로써 자신의 정체성을 찾게 된다. 그래서 우리는 광고 등을 통해 등장하는 사용자상이 제시하는 꿈과 스타일에 공감할 때, 그 제품을 선택하게 된다.
기업의 정체성
심벌마크에서 포장디자인에 이르기까지 일관된 이미지(Corporate Identity Program)속에서 우리는 특정 기업의 경영 철학이나 서비스 등의 그들이 추구하는 가치관을 느끼게 된다. 이러한 가치관은 기업 속에서는 내부적 결속을 갖게 하고, 소비자에게는 기업을 인식하는 수단이 되어진다. 알레시사의 제품을 보면 그 기업정신인 ‘제품은 시가 되어야한다’라는 철학을 느낄 수 있다.
이렇게 디자인된 제품을 통해서도 기업의 정체성을 대면할 수 있다.
국가의 정체성
의도적 디자인 경향에서 국가의 정체성은 크게 보편성과 특수성 2가지로 구분할 수 있다. 보편성은 세계시장에서 공유할 수 있는 보편적 감수성을 가진 디자인을 하는 경우로 특별한 문화적 근원을 갖지 않으려 노력한다.
반면 특수성의 경우 풍부한 정책을 바탕으로 하는 디자인으로 향수는 프랑스제, 전자제품은 일본..이라는 식의 지역이나 성향에 의해 의도적으로 드러내며 디자인하게 된다.
이러한 것 모두 디자인된 인공물들이 국가적 정책성을 가짐을 알 수 있다.
디자인의 역사
가구나 패션, 공예 디자인의 역사는 인류와 그 태동을 함께한다. 하지만 여기서는 산업혁명이후의 근대디자인부터 다루도록 한다. 이유는 이때부터 대량생산이 가능한 적극적 인공물의 생산시대였기 때문이다.
1. 산업혁명
18세기 영국에서 일어난 산업혁명은 기계혁명이자 생산혁명이고 사회혁명이였고, 동시에 디자인 혁명의 시기로 영국에서는 자유무역론을 내세워 세계시장을 지배하게 된다. 당시 런던에서 열린 세계 최초의 박람회장 건물인 수정궁은 주철로 된 구조물의 미학적 가능성을 보여주었으며, 기계로 제작되어진 전시품들은 디자인에 대한 인식을 새롭게 한다.
당시 시대적 분위기를 이해하기 위한 몇가지 키워드를 보면
중공업의 발달
광산개발과 제강법의 발명으로 제철업이 발전하고, 무역의 확대로 인한 원료 및 상품의 운반 필요에 따른 Fulton의 증기선, Stephenson의 증기기관차. 철도의 발전 등의 교통기관이 발전하게 된다.
제국주의와 식민지의 확보
천연자원의 확보와 양산된 재화를 위한 시장을 개척하게 된다.
인구의 도시 집중화
산업의 발전으로 도시에 일자리가 많아짐에 따라 농업인구가 도시로 집중적으로 이동하며 노동운동이 시작된 시점이기도 하다. 또한 중산층이 확산되게 된다.
대량생산
가내수공업 형식의 생산시스템이 공장식 대량생산 방식으로 바뀌게 된다. 이는 제품의 질적 하락을 가져오게 될뿐만 아니라 중세의 기술전통의 단절을 초래한다. 또한 부정적 의미로 인간 중심에서 기계 중심으로 한 공예관의 혼란 뿐만 아니라, 정신문화의 쇠퇴와 환경의 오염, 도시의 슬럼화 현상이 나타나게 된다.
인쇄술과 사진술의 개발
1797년 석판의 3색 인쇄로 색채복제가 가능하게 되고, 사진술이 개발됨으로써 출판디자이너가 요구되어 진다. 특히 1890년 설립된 켈름스코트 인쇄소에서는 ‘건축과도 같은 책’을 주장, 예술형태로서의 책이 시작된다.
2. 빅토리아 시대 1832~1901
19세기 산업혁명의 휴유증의 발발로 나타난 혼란한 조형관을 중세의 장식과 예술을 모범으로 회귀할 것을 주장하게 된다. 대표적 인물로 존 러스킨과 퓨진 등이 있다. 특히 존 러스킨은 [베니스의 돌 (Stones of Venice)]이라는 그의 저서에서 예술은 이미 르네상스 시기부터 쇠퇴하기 시작 했다고 주장하면서 고딕 성당의 생기 있고 찬란한 장식에 찬사를 보낸다.
3.미술공예운동
19세기 영국에서 기계생산 공예품에 대한 반작용으로서 시작된 운동으로 기계를 부정하고 중세시대의 수공예 생산방식의 복귀를 주장한 운동으로 대표적 인물로 윌리엄모리스가 있다. 그는 1861년 마샬포크너상회를 설립하여 벽면장식과 조각, 스테인드 글라스, 금속세공, 가구를 제작하는 등 독자적 디자인에 의한 수공예적인 것을 찬미하며 기계에 의한 기쁨 없는 노동을 윤리적인 입장에서 비판하였다. 미술공예운동의 역사적 의의를 살펴보면,
첫 째 가치 있는 예술을 생산해야 한다는 윤리적 신념에서 유래한 것으로 민중을 위한 조형을 역설하고 '만인이 함께 나누어 가질 수 있는 예술'을 추구하고 있다.
둘 쨰 근대화 운동의 출발점으로 이후 독일 공작연맹이나 바우하우스의 조형에 결정적인 영향을 끼쳤으나, 동시에 중세 상태로 되돌아가고자 하는 것이었으므로 반근대화 운동이다.
셋 째 새로운 것에 대한 진취적인 자세보다는 과거의 양식을 모방하고 부흥하며 재현시키는 절충주의적 경향을 나타내었던 것이 대부분 이었다.
넷 째 수공예를 강조하여 대중 예술을 주장하였으나, 기계제품보다 저렴하지 못했기 때문에 대중을 위한 것이 되지 못했다.
윌리엄 모리스 William Morris, 1834-1896
영국의 공예가, 시인, 사회사상가, 영국 빅토리아 시대의 대표적인 비판적 지식인의 한 사람으로서, 그의 사상과 실천은 근대디자인의 출발점이며 이후 디자인의 역사에 미친 영향이 지대하다.
그의 문제 의식의 출발은 무엇보다도 당시 산업자본주의적 현실에서 생산품의 질적 저하와 인간 노동의 소외에 있었다. 그리하여 그는 이전의 중세 사회을 이상으로 간주하고 기계생산을 부정했으며 사회주의 이념을 표방했다. 또 그는 스승인 존 러스킨의 사상을 이어받아 '예술의 민주화'와 '예술의 생활화'를 열렬히 주장하였는데, 이는 바로 근대 디자인의 이념적 기초가 되는것이다.
1861년에는 모리스, 마샬, 포크너 상회를 설립하여 직접 공예품을 제작하는등 이념의 실천에서도 매우적극적이었다. 1890년에는 캠스코트출판사를 설립하여 중세의 필사본 전통의 계승을 시도하였다.
전반적으로 낭만적이고 유미주의적인 의식의 소유자였던 모리스는 근대디자인의 선구자로서 위대한 업적을 남겼지만, 대체로 그의 사상과 실천은 복고주의, 엘리트적 실천, 시대착오적인 기계의 부정이라는 한계와 모순을 드러냈다.
겜블하우스(gamble house)
Charles & Henry Greene 형제가 설계한 미국 미술공예운동의 대표작으로 영화 Back to the Future에서는 과학자의 집으로 등장하고 있다.
4. 아르누보
아르누보는 1890년부터 20세기 초기에 걸쳐서 약 20년간 벨기에와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개되어 제1차 세계대전 무렵까지 유럽과 미국 등지에서 건축, 조각, 회화, 공예, 디자인 등 모든 장르에서 역사적 양식을 탈피하고 새로운 미를 창조하려 했던 범 유럽적 장식미술 운동이다. 특히 자연형태에서 모티브를 빌어 새로운 표현을 얻고자 했다. 이는 곡선, 곡면을 활용한 유동적인 미를 낳는 반면 기능성, 합리성이 소홀하여 형식주의적이고, 탐미적인 결과를 가져오게 된다. 또한 그것은 과학과 기술의 진보를 예술의 세계에 끌여들여 조형 예술과 응용 미술의 구별을 없애려 한 운동이기도 하였다.
그 결과 아르누보는 전체적으로 19세기적인 양식으로 부터 벗어나 전혀 새로운 것을 창조하려 하였으며, 궁극적으로 20세기 반예술 운동의 선두에 위치하였다.
아르누보의 양식적인 기원은 영국의 미술 공예 운동에 두고 있으며, 그 태동 배경으로는 첫째로 18세기 후반부터 영국에서 시작된 산업 혁명으로 인해 철의 제조 기술이 놀라울 정도로 발전함과 동시에 방적, 섬유 공업의 발전으로 막대한 노동력이 필요해져, 도시의 인구집중을 초래하게 되었다.
둘째, 건축에 있어서 철이 값싸게 공급되고 유리 기술의 진보로 빛이 충분히 들어올 수 있는 건축물을 만들 수 있게 되었는데 이것은 지금까지 돌을 이용한 축조 방법을 근본적으로 동요시키는 결과가 되었다.
셋째, 이러한 새로운 재료의 발명과 이것을 구축하려는 공학 기술의 진보는 건축을 지금까지의 좁은 틀에서 벗어나 건축주제의 변화를 가져오게 하였다. 그동안은 사원이나 궁전이 대 건축을 지칭하였지만 산업 혁명에 의한 인구의 도시집중으로 귀족이 아닌 노동자의 주택, 백화점, 증권거래소, 철도의 발달에 의한 정거장과 각종공장 등으로 건축의 주제를 확대시켰다.
아르누보는 새로움이라는 개념으로 해석되었으며 주로 곡선을 사용하여 식물을 모방한 까닭에 '꽃의 양식', 물결의 양식, 당초양식 등으로 불려지고 있다. 아르누보 양식은 과거의 복고주의적 장식에서 탈피하여 상징주의 형태와 패턴의 미학을 받아들임으로써 미술을 모든 생활에 실용화하여 했던 점에서 커다란 의의가 있다.
아르누보의 명칭은 New Art(신예술)이란뜻으로, 모던 스타일(영), 유켄 스틸(독), 세세션(오), 스틸레 리베르타(이)등의 이름으로 불리운다. 이론적, 사회적으로 '공예운동'의 영향을 받아, 일상생활 환경의 혁신을 지향하였으나, 본질적으로는 유미적이고 개인주의적 경향이 짙어 기능 및 기계생산에 적절히 대응하지 못해, 20세기초 상업주의의 비속화속에서 자멸하게 된다.
5. 유켄 스틸 Jugend Stil
독일식 아르누보 양식과 경향에 대한 호칭으로 1896년 뮌헨에서 발행되고 있던 미술잡지 유겐트(Jugend)에서 유래한다.
아르누보의 대표적 작가인 헨리 반 데 벨데와 독일공작연맹의 선구가 된 피터 베렌스(Peter Behrens)가 유켄 스틸에서 활동했다.
헨리 반데벨데
벨기에의 화가, 건축가, 디자이너, 1896년 사무엘 벵 상 점의 실내장식을 디자인했고 그는 장식성이 강한 아르누보풍 의 선각자이자 대전술가로서 그의 대표적인 건축물로는 베르크분트(Werbund)극장, 브레셀의 그랑대학도서관, 크뢸러 밀러 박물관 등이 있다.
6. 분리파
19세기말 프랑스 인상파의 영향을 받아 주로 독일과 오스트리아를 중심으로 일어난 반아카데미즘 미술운동으로, 1897년 요젭 호프만, 요젭 마리아 올브리히, 구스타프 클립트 등이 빈에서 결성한 그룹이다.
분리파라는 이름은 아카데믹한 예술 그리고 과거의 모든 예술로부터의 분리를 목표로 한다는 의미에서 붙여진 것으로서, 넓게 보면 아르누보에 속하지만, 근대 디자인으로 넘어가는 과도기 단계로 이해할 수 있다. 이들 중 다수는 요젭 호프만이 설립한 빈 공방을 중심으로 활동하였다. [빈 공방(工房)]은 일용품에서 실내장식품에 이르기까지 여러 가지를 제작, 당시의 유행을 지배하였으며 디자인 비즈니스 확립에 공헌한 바가 크다.
분리파의 작가들의 가장 큰 특징은 정사각형을 중심으로 한 풍부한 장식성과 상징성을 들 수 있으며, 일본의 문화에 많은 영향을 받았다. 특히 클림트의 화려한 골드마감은 이국적 화려함을 선호하던 비엔나 귀족들에게 크게 어필했다.
역사를 돌아돌때, 분리파는
1. 시민예술을 추구하였으나 오히려 귀족주의가 되었다.
2. 장식을 탈피하려고 노력하였으나 완전히 장식을 벗어나진 못했다.
7. 독일공작연맹
아르누보 운동의 퇴조와 가전제품의 보편화, 컨베이어 시스템 도입에 따른 대량생산 등의 영향으로 기계에 적합한 조형의식을 탐색하게 된다.
1907년 건축가이자 관리였던 헤르만 무테지우스를 중심으로 결성된 독일공작연맹은 예술가나 건축가 뿐만 아니라 공업이나 상업에 종사하는 실업가를 포함한 디자인 진흥 단체였다. 단순한 공예 운동이나 건축 운동이 아니라 결집된 형태의 운동을 전개함으로써 디자인의 근대화를 추구했다는 점에서 그 의의가 있다.
합리적 기능주의와 표준화 :
독일 공작 연맹이 미술과 산업의 협력에 의해 공업 제품의 질을 높이고 규격화를 목적으로 결성되었다고 할 수 있다. 또한 규격화한 형태로서 대량생산하여 그 목적을 달성할 수 있다고 생각하였으므로 간결하고 합리적인 양식을 만들어 가고자 했다.
독일공작연맹의 의의 ;
1. 무테지우스는 [공예]란 말 대신에 [공작]이란 용어의 사용으로 인더스트리얼 디자인의 확립했다.
2. 미술공예운동의 감화로부터 출발하지만 독일의 공작노동의 질적 수준 향상이 목표이다.
3.기능적이고 구조적이며, 기하학적인 디자인으로 미술과 산업을 밀접하게 결합하는 독일 디자인을 실천하였다.
4. 바우하우스에 영향을 주어 학교 교육에 예술, 공예, 공업의 통일을 실현하고자 하였다.
페터 베렌스Peter Behrens와 기업을 위한 디자인 CI
독일의 AEG 사는 다른기업과의 경쟁의 대안으로 페터 베렌스를이 회사의 디자인 고문으로 고용 한다. 오늘날 우리가 인더스트리얼 디자이너의 활동을 한 최초의 고용디자이너이다. 베렌스는 장식적인 디자인으로 부터 대량 생산을 위한 방향으로 유도했다.
AEG가 디자인 역사 가운데에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는 이유는, 기업 이미지의 통일을 위한 CI프로그램을 도입한 선례를 남겼기 때문이다.
8. 데스틸
독일의 표현주의, 소련의 구성주의와 함께 출현한 운동이 네덜란드의 데 스틸이다. 데 스틸은 데오 반 되스버그, 몬드리안 등이 1917년에 파리에서 결성한 그룹이자 잡지의 이름으로 새로운 기계시대의 상징으로 '기하학적인 형태가 기능적인 것'이라는 기능주의 철학을 대두시켰고 추상 회화의 수평과 수직으로 이루어진 단순화된 평면 구성을 회화의 영역을 넘어서 건축, 공예, 그래픽 디자인에 이용하여 새로운 형태를 부여한 운동이다.
입체파에서부터 비롯된 추상미술을 조형예술 전 분야에 걸쳐 본격적으로 추상미술을 전개시킨 최초의 운동이었다. 이들은 조형예술의 통합을 주장하였는데, 그 원리는 회화, 건축, 산업 디자인을 막론하고 모든 공간을 동일한 평면으로 간주하여 기하학적 형태와 삼원색을 기본적인 조형요소로 적용하는 것이다. 이들의 지도 이념은 순수성, 직관성을 중시하는 몬드리안의 신조형주의로부터 조형물의 효과나 구체성을 중시하는 반 되스부르크의 요소주의로 옮겨갔으며, 1920년대에는 네덜란드를 넘어서 국제구성주의운동으로 발전해 갔다.
대표적 인물로는 게리트 리트벨트가 있고, 몬드리안의 작품을 그대로 옮겨놓은 듯한 그의 작품 [레드블루의자]와 슈뢰더 주택을 들 수 있다.
9. 바우하우스
1900년대는 기계산업의 잠재능력을 긍정하고 그 미적 가치를 인정해 가는 시기로 당시의 공예교육과 미술교육으로는 새로운 산업사회에 대처할 수 없다는 생각으로 국제무역 환경의 변화에 적극적으로 대처하고자 정책적으로 디자인교육이 이루어졌다.
바우하우스는 1919년에 독일공작연맹의 멤버로 활동했던 월터 그로피우스를 중심으로 독일의 바이마르에 설립된 국립 디자인 대학이다. 독일공작연맹의 이념을 계승하여 예술적 창작과 공학적 기술의 통합을 목표로 삼은 새로운 교육기관으로서 현대 건축, 회화, 조각, 디자인 운동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
바우하우스는 "완벽한 건축물이 모든 시각예술의 궁극적 목표다."라고 선언하였으며 교사와 학생이 함께 하는 공동사회적 책임을 지향하였고 1923년 이후 기계의 사용으로 예술과 공업기술의 통합을 목표로 합리주의적인 모던 디자인을 향한 새로운 시도들이 있었다.
특히 그로피우스가 제기한 '산업과 예술의 결합'은 마이어의 시대가 되면 한층 더 기능주의적 방향으로 전개되어 디자인의 사회성을 강조하게 된다.
19세기 이상주의와 20세기의 현실주의를 결부시킨 그로피우스는 교육을 통한 사회 개혁을 주장하였으며 이러한 바우하우스의 초기 이념들은 발전과정에서 많은 변화와 수정을 거쳤으며, 결국 바우하우스는 산업과 접촉함으로써 디자인의 사회와 운동에 기본이 되는 교육적 성취와 현대 디자인의 이정표를 정립하는데 공헌하였다.
당시 바우하우스의 교육과정을 살펴보면 지금의 디자인교육과 맥을 함께함을 알 수 있다.
1. 예비 교육(2기 바우하우스 부터는 기초 디자인)
2. 전공 교육(각 분야별 전공 교육)
3. 통합교육(건축으로 통합하는 교육을 의미한다.)
바우하우스는 1925년 데사우로 이전하였다가 1932년에 다시 베를린으로 옮겨 간 뒤 다음 해인 1933년 나치스에 의해 폐교되었다.
월터 그로피우스
1883-1969 바우하우스의 설립자이자 근대건축과 디자인 운동의 대표적인 지도자. 베를린에서 출생. 뮌헨과 베를린에서 건축을 공부하고 1908년과 10년 사이에 페터 베렌스의 사무실에서 일했다. 1919년에는 바우하우스 교장으로 임명되어 중심적인이물로 활동하다 1928년 사임하였다. 1929년에는 근대 건축 국제회의의 부의장으로 추대되기도 하였다. 바우하우스 폐교 이후 1937 년 에는 미국으로 건너가 하버드 대학에서 건축을 가르치면서 미국 디자인계에 영향을 미쳤다.
10. 아르데코
20세기 초의 예술사조가 합리성과 단순성, 그리고 구조적 기능성을 요구하게 되면서 아르데코가 태동하게 된다. 아르데코는 공업적 생산 방식을 미술과 결합'시킨 기능적이고 고전적, 기하학적인 미를 추구한다. 1925년 파리에서 개최된 파리 장식 전람회(L Exposition Internationale des Arts Decoratifs et Industriels Mordernes) 의 명칭에서 유래한 것이다. 아르누보의 뒤를 이어 1920-1930년대 프랑스를 중심으로 전세계에 전파되고 유행된 양식이다. 아르데코는 20세기의 입체파, 미래파 등에 의해 개척된 모더니즘 양식을 기본으로 하면서도 그것을 장식적으로 활용했다는 점에서 모더니즘의 장식적 가능성을 보여주며, 또 그 점에서 19세기의 아르누보와 구별된다. 따라서 유동적인 곡선을 애용했던 아르누보와는 대조적으로 아르데코는 기하학적인 형태와 반복되는 패턴을 보여준다.
한편 아르데코는 미국에서 화려한 꽃을 피웠는데, 할리우드 양식, 또는 재즈양식으로 불리운 미국의 아르데코는 프랑스와는 달리 대도시의 고층건물 등에 적용되는등 보다 웅장하면서도 사치스런 방향으로 발전해 갔다.
아르데코의 양식적 특징은 모더니즘과 장식미술의 결합에서 찾을 수 있으며, 아르누보가 비대칭으로 화려한 식물의 유기적인 곡선을 지향한 데 비해서 아르데코는 대칭으로 기계적인 추상적 형태와 기하학적 직선, 유선형을 지향하게 된다.
또한 아르데코의 재료적 특징을 보면 크롬과 같은 반짝거리는 재료를 많이 사용하였고 오리엔탈리즘이나 포비즘의 영향의 담홍색, 청회색, 노란색, 짙은 군청색 등을 사용하였다.
11. 모더니즘과 산업디자인
1920년대즈음을 시작으로 모더니즘 디자인 운동은 생활양식의 합리화를 추구한 점으로 성격을 규정할 수 있는데... 표준화, 대량생산 등이 생활에 밀접하게 관련을 맺으면서 시작되었다고 볼 수 있다. 즉 비즈니스에 목적을 둔 디자인 시대가 열리고 있음을 보여준다.
특히 미국은 독일의 기능주의를 중심으로 한 유럽의 유토피아적 모더니즘 디자인 이론을 더 발전시켜 매니지먼트, 판매촉진, 광고 등을 고려한 판매를 위한 현실적 디자인으로 발전시킨다. 이는 미국적 디자인 비즈니스, 이른바 상업주의적 모던 디자인을 실현하였으며 경제불황을 극복하는데, 큰 역할을 한다.
당시 포드사의 모델T는 제작 비용 절감을 위해 1914년부터 1925년까지 오직 검정색 만을 고집하다가 1920년대부터 일기 시작한 대공황이라는 경제적 전환기에 이르러 판매 심리를 유발할 수 있는 다양한 종류의 색채에 자리를 양보하게 된다.
당시 공업이 발전함에 따라 자연스럽게 공업디자이너가 생겨나기 시작하는데., 비로서 비즈니스를 위한 디자인 성립으로 전문직업으로서 공업디자이너가 등장한다.
급속도로 발전하는 과학은 미래에 대한 긍정적, 부정적 시각의 양면을 보여주는데, 디자이너는 아메리칸드림을 형성하는 [꿈을 생산해 내는 직업]으로 인식되게 된다.
대표적 디자이너로 레이몬드로위, 월터도윈티그, 헨리드레이퍼스 등이 있다.
1940년대 이후 미국 디자인의 지배적 특징으로는 간결하고 자유로운 형태를 들 수 있다. 그래서 유기적 모더니즘이라 칭하기도 한다.
당시 디자인이 갖는 사회적 위치를 잘 설명해 주는 명언으로 헨리 드레이퍼스의 [대중을 위한 디자인]이라는 그의 저서를 통해 “디자인은 말없는 세일즈맨이다”라고 표현한다.
그 척도를 실용성과 안정성, 유지보존, 원가, 판매호소력, 외관으로 두는 것을 볼 때, 디자인을 비즈니스에 적극적으로 이용하였음을 알 수 있다. 실지로 당시 공업디자이이너들은 제품을 디자인할 때 휴먼 스케일을 활용하였으며, 이는 제품의 기능을 설명할 때 과학적, 객관적 정당성을 가진다. 또한 디자인의 학제적 위치가 외관만을 아름답게 만들기 위한 조형적인 문제에 국한될 수 없음을 보여주고 있다.
12. 팝아트
팝아트는 영국에서는 젊은 예술가를 중심으로 미국적 대중 이미지에 대한 학구적인 탐구에서 발단 1965년 Tomorrow전. R.hammilton 의 collage로부터 시작되었으며 미국에서는 추상 표현주의 양식으로 서서히 성장 1955년 neo dada, 1962년 new realist전시로 공식적인 팝아트가 시작되었고, 비평계의 저항을 극복하고 대중적으로 성공 1964년까지 크게 유행하였다.
팝 아트의 용어는 영국 비평가 Lawrence Alloway가 1954년 광고문화가 창조한 대중예술이란 의미로 사용하면서 처음 대두되었다.
1962년 순수미술의 맥락에서 대중적 이미지를 사용하는 예술행위로 확대적용 되었다. 빛나는 색채, 날렵한 디자인(때론 거대한 사이즈로 확대된), 기계적인 질감들과 같은 대중적 소재로 접근함으로써 순수미술과 대중미술의 벽을 허물고 있다.
팝 아티스트들은 대량 소비시대의 산물인 행버거, 변기, 잔디 깍는 기계, 립스틱 케이스, 스파게티, 엘비스 프레슬리에 대한 경애 등을 표현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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